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야 소피아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근세, 근현대]] === || [youtube(N8JflrTs4Dg)] || || 1920년, 오스만제국 말기의 아야 소피아 모스크 ||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 이끌던 오스만군에게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날, 아야 소피아 [[성당]]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 성당만은 남겨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성당 안을 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이야기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나서 그날 저녁으로 이 성당에서 저녁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병사들이 성당을 약탈하자 기분나쁘듯 쳐다보긴 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대가로 사흘 동안의 약탈 행위를 허락했기에 그냥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몇몇 병사들이 불을 지르자 분노하면서 그들을 채찍질하며 '약탈은 허락해도 불태우는 짓은 허락 안 했다'며 주의를 주고 불을 끄게 했다. 다만, 이 약탈에 너무 신경썼는지 이스탄불 곳곳 여러 건물이 불타기도 했는데 이거에 대해서도 메흐메트 2세는 화내면서 "짐은 이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려한 만큼 방화만은 일절 용서없다!" 라면서 불을 끄게 했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자리에 예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했다.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대대로 동로마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메흐메트 2세가 총대주교 취임식에 필요한 은제 십자가도 손수 마련해 예나디오스 2세 스홀라리오스를 임명한 것은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동로마 황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도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는 '''\'이교도에 정치적으로 정복을 당하더라도 서방의 기독교의 탈을 쓴 악마들보단 낫다\''''는 반서방파의 수장이기도 했으므로 정교회 자체 내부의 '불순분자'들을 몰아 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등은 '[[로마 가톨릭|서방 교회]]에게 머리 숙이고 통합 당하더라도 서방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자'고 주장한 친서방파를 지지했고, 최후에는 동서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으나 이로써 흐지부지 됐다.] 이후 하기아 소피아(Αγία Σοφία) 대성당은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튀르키예어식의 아야 소피아(Ayasofya)로서 그 이름만 보존한 채 황실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내부의 모자이크로된 동로마 제국 시절 [[이콘|성화]]에 회칠을 하여 가렸고[* 그러나 성화들은 18세기까지도 상당수가 회칠이 칠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었다. 1710년, [[대북방전쟁]] 당시 벌어진 [[폴타바 전투]]에서 패전하여 망명한 [[스웨덴 국왕]] [[칼 12세]]와 함께 코스탄티니예를 방문한 네덜란드인 코르넬리위스 로스(Cornelius Loos)는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아흐메트 3세]]의 특별허가를 받고 아야 소피아 내부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는 주요 모자이크와 성화들, 그리고 현재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성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https://www.pallasweb.com/deesis/drawings-hagia-sophia-loos-grelot.html|그림보기]] 오스만 제국 시기 모스크로 개조된 이후에도 300여년 가까이 옛 성화들이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말 지진으로 아야 소피아 내부 벽면에 금이 가고 훼손되자 급하게 보수를 하면서 전면적인 회칠이 칠해졌고, 1847년 [[압뒬메지트 1세]]는 [[이탈리아인]] 가스파레 포사티와 주세페 포사티 형제에게 수리를 맡겼다. 이때 현재 볼 수 있는 이슬람식 내부장식이 완성되었다. 아야 소피아는 오스만 제국시기 동안 황실 전용 모스크였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었고 황제의 명령 없이는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모스크]]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트 2세]]때 미나렛[* 무슬림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리는 뾰족한 등대모양의 첨탑]을 하나 세우고, [[셀림 2세]]때 미나렛 3개를 더 증축했다. 그리고 원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세워진 제대를 모스크로 바뀌면서 무슬림 예배를 위해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고, 이 때문에 건물과 제대의 방향이 약간 틀어져 있다. 이후 아야 소피아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황제가 행차해 예배를 인도했으며, [[톱카프 궁전]]에서 아야 소피아까지 이르는 행차는 누구나 관람할 수 있었다. 이때 백성들은 황제에게 자유롭게 조언 및 상소를 할 수 있었으며, 황자의 [[할례]]식 같은 경사스러운 행사 때는 구경꾼들에게 금화를 뿌리기도 했다. 성당 자체의 구조적 결함과 노후화된 건축물이라는 점 때문에 이미 11세기경부터 버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고딕양식의 성당처럼 버팀대를 세웠지만 오스만 제국 시기에 들어서 이것도 버티지 못하고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건물을 손보고 미나렛도 세우기 위해 버팀대 4개를 더 세웠다. 이때 공사를 진행한 사람이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